'감정'과 '감정적' 차이

 

감정과 감정적 차이 

'감정'과 '감정적' 이라는 것 


- 감정은 모든 의미를 살아 숨 쉬게 한다. 여기서 '감정emotion'이라고 함은 '감정적emotional'이라는 뜻이 아니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보통 폄하하는 뜻으로 쓰이는데, 그 말이 감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집어삼켜 버린 면이 적지 않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감정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너무나 과한 감정을 가리킨다. 우리를 손안에 쥐고 휘두르는 것으로 모자라 아침이면 뻔히 후회할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그런 감정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난다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안탑깝게도, 우리는 감정이라는 것 전체를 그렇게 정의하면서 의사 결정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배웠다. 마치 어떤 감정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감정에 초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감정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뭉텅이 감정


- 문제는 감정과 '감정적'이라는 사회적 관념을 혼동하는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감정의 일반적인 분류 방식을 봐도 우리가 감정을 얼마나 꺼리는지 드러난다. 사랑, 분노, 질투, 증오, 기쁨, 행복, 괴로움....등 우리는 감정을 그렇게 뭉뚱그려서 구분해 놓고 이름을 붙여 놨다. 그런 것을 '뭉텅이 감정(big-box emotion)'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가장 강력하고 섬세한 감정까지도 싸잡아서 일률적으로 간단하게, 때로는 완곡하게 정의해 버린다. 감정을 간추림으로써 그런 감정들로부터 안전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감정을 가둬 놓고 길들이고 싶은 유혹은 확실히 크다. 

우리를 집어삼키려 드는 감정의 마수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감정이란 것은 틀 안에 가둘 수 없다. 뭉텅이 감정은 여기저기서 터지고 줄줄 샌다.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다. 감정의 목적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니까.

감정이 진화한 목적


- 일종의 '조기 경보 시스템' 구실을 하기 위해서다. 뭔가 중요한 사실이 감지되면, 우리의 인지적 무의식은 감정이라는 메신저를 내보내 주의를 잡아끌고 바로 그 순간 중요한 것에 주목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겁을 먹기 쉬운데, 감정이 일부러 우리가 무척이나 중시하는 '통제감'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료하고 침착하게 사고하려는 마음에서 감정을 차단하려고 한다.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책에서 우리가 감정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느낌과 감정이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로서, 생각의 유형적 내용물과 나란히 취급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여겨진다. 느낌과 감정이야말로 '생각을 구체화해 주는' 존재인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감정을 차단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감정은 우리가 매 순간 끊임없이 느끼는 것이며, 대부분 이름이 없다. 뭉뚱그린 틀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며, 우리도 모르게 우리 행동을 이끌어 준다. 


그 어떤 주제에 관해 그 어떤 심상을 의식에 떠올리더라도 늘 감정과 그에 따른 느낌이 꼬박꼬박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라고 한다. 아무리 회피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부인하고 무감각해지려고 한들, 감정을 애초에 느끼지 '않을'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감정의 역할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감정은 우리가 매 순간 다음 행동을 결정해 나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리 기를 써 봤자 감정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 


-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틀린 말이다. 감정은 항상 이성과 함께하니까. 이성과 감정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공존한다. 

그렇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은 우리를 대개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 

일단 느끼고 그 다음에 생각한다 


-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이성적 결정을 단 하나도 내릴 수 없다. 

우리의 사고 전략은 아무리 완벽히 가다듬어져 있다 해도 개인과 사회의 불확실하고 복잡한 문제를 다루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합리성이라는 빈약한 수단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한다. 


감정과 이성은 대결 관계가 아니라 같은 팀이다. '나'라는 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줌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자연 속 정글에서든 도시의 정글에서든 마찬가지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의외일 수도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감정이 없다면 합리성은 빈약하다 못해 아예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감정이 없으면 선택할 수 없다 (예시) 


- 다마지오가 자주 예로 드는, 엘리엇이라는 이름의 환자가 있다. 엘리엇은 성공한 남성이었다. 좋은 직장에 다녔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존경받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에게 뇌종양이 생겼다. 

검사를 해보니 다행히 양성이었고, 수술로 종양을 말끔히 제거했지만 이미 전두엽의 일부 조직이 손상된 후였기에 그 부분도 제거해야 했다. 수술에서 회복한 엘리엇은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 속은 예전의 엘리엇이 아니었다. 


다마지오가 종합적으로 검사해 보고 내린 결론은, 엘리엇이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잃었다는 것. 그런데 그의 '객관적' 지식은 전혀 이상이 없었다. 지능 검사 결과는 여전히 상위 3퍼센트에 들었다. 엘리엇은 어떤 질문을 받아도 가능한 모든 해답을 일일이,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 내놓았다. 그런데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고르지 못했다. 점심 메뉴 선택이라는 단순하고 기초적인 결정조차 내릴 수 없게 됐다. 
 

※ 감정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반적이지도 않다. 감정은 구체적이어서,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감안해 선택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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