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이미지가 떠오르게 쓰자 |스토리 구성

 

구체적 쓰기 

떠올릴 수 없다면 존재하는 게 아니다


-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정신적 사고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내 특별한 능력은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효과와 가능성, 그리고 결과를 시각화하는 데 있다. 


이야기는 볼 수 없다면 느낄 수도 없다. 추상적 개념이나 일반론, 개념어들은 우리를 매혹하기 어렵다.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어떤 식으로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뇌는 그다지 즐거워 하지도 않고, 집중을 해서 깨닫는 것은 '엄청 지루하다'라는 사실 뿐이다.  "아무리 집중을 한다 해도 그것만으론 의식에 자극을 주기에 충분치 않다. 당신이 끈 이론에 관한 논문을 읽고 있다고 해보자. 


시선을 똑바로 고정하고 입으로 단어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간다 하더라도 뇌에는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다. 아무리 계속해도 마찬가지다. 


반면, 이야기는 지루한 일반론을 걷어내고, 거기에 구체적인 옷입 입혀서 독자가 한번쯤 입어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의 뇌는 삶의 모든 것을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의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이야기의 핵심은, 일반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번역해서 그것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것과 대면할 때를 대비해서,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는 것'이다. 

인간은 시각적 이미지에 탁월하다. 우리의 뇌는 이 능력을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능력으로 진화시켜, 실제 세계에서 위험이나 손해 없이 앞으로 다가올 행동들을 미리 연습할 수 있도록했다. 


- 결국 이 얘기를 요약하면, 이야기는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몇몇 작가들은 종종 일반론의 함정에 빠져서 이야기를 쓴다. 이 경우 그들은 개념만이 독자를 매혹시킬 수 있다고 믿거나, 

더 나쁜 경우 구체적인 것을 채우는 일은 독자의 곳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일반론 VS 구체성 


- 거대한 폭풍 속에서 휩쓸려 가는 소년의 얼굴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난 엄마를 믿었는데, 결국 날 놓아버렸네.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름 모를 6천 명이 홍수로 죽었다는 사실보다, 

이처럼 홍수로 소년이 휩쓸려가는 구체적인 장면을 지켜보는 일이 훨씬 더 우리 가슴을 저맇게 한다. 당신이 다른 수많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의 그 문장을 읽었을 때는 마음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뇌는 아무리 크고 끔찍한 사건이라 해도, 그것이 일반화되어 제시될 경우 우리에게 미치는 감정적 파장은 크지 않다. 



따라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그 곁을 지나쳐 가기 쉽다. 왜냐하면, '수동으로' 하기 위해 일부러 멈춰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적 파장이 생길 만큼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일, 하지만 굳이 그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똑똑한 두뇌는 그도로 게으르다. 더 하는 것보단 덜 하는 것을 즐긴다. 마치 미니멀리즘을 신앙으로 삼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홍수로 인한 비극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미 일어만 비극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핵심은 이거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말한다면 당신으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그때 당신은 내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감정은 곧 반응이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결정한다. 생각은 그저 따라올 뿐이다. 사실들은 우리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할 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일반화의 범위가 수천 배 더 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비인칭 일반화보다 무한히 많은 영향력을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느껴라. 그 다음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마술이다. 이야기는 일반적인 상황, 생각, 가정들을 들고 와 구체화를 통해 구현한다. 


구체성에 관하여 


- 일반론이란, 구체적인 어떤 것도 지칭하지 않는 포괄적인 생각, 감정, 반응, 사건을 말한다. 예를 들어 "트레버는 좋은 시간을 보냈다"라는 문장을 보자. 그것은 그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또 그에게 좋은 시간이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일반론이다. 

또 "거트루드는 언제나 그녀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라는 문장을 보자. 여기서는 그 사업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거기 관심이 있는지, 그렇다면 왜 여태껏 시작하지 못했는지를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이다. 

일반적인 개념은 교활한 악마와 같다. 이 악마는 당신은 이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끼어들어 블라인드를 내린 다음, 독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작가는 왜 모호해지는가?


- 작가들은 자신들이 모호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따금씩은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한다. 작가들이 이야기를 일반론에 맡겨버리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작가가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을 때 

- 그는 자신에게 매우 명확한 어떤 개념이 독자들에게는 완전히 불투명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작가가 이렇게 썼다고 해보자. 

"르네는 오스굿을 바라보았다. 그는 꽉 끼는 청바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고 찢어진 컨버스 하이탑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이란 대체 무슨 뜻인가? 그 미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오그굿이 진짜 멋쟁이가 아니라 그저 흉내만 내는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 아니면 오스굿이 실은 그녀의 이상형이고, 오늘밤 그녀가 그에게 고백한다는 뜻인가?

혹은 르네는 액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지만 오스굿은 결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는 것? 작가는 그 '의미심장한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문제는 독자인 우리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2) 작가가 이야기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할 때 

- 르네가 오스굿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이유는 단지 플롯사의 필요 때문이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작가는 당신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할 것이다. "잠깐만요. 그럼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3)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의미심장한'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잘 인식하고 있는 경우

- 이때는 작가가 독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지 않으려는' 두려움을 갖고 있을 때다. 이런 잘못된 두려움은 좋지 않다. 


※ 너무 잘 알아서든 몰라서든 혹은 일부러 그렇게 해서든, 모호해지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모호함이 당신의 이야기 속 어디에 침투해 있는지 밝혀내기 위해 상습 침투 구역 몇 군데가 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