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 인간관계 중요성 |스토리 구성

 

인간관계 중요성 

'무엇' 보다 '왜'가 더 중요하다


-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모든 것에 대해 추측한다. 그것은 호흡과 같아서, 우리의 생존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로를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면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우리는 이렇게 매순간 추측을 한다. 

우리의 추축은 이전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높은 지능을 가진 몇몇 다른 종들이 관찰과 예측이라는 기초적인 시도만을 하는 것과 달리, 인간은 '왜'라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왜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면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이론을 세울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것을 우리의 이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러면, 그러므로'의 논리 


- 우리는 안다. 삶과 이야기 모두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런데 감정은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감정이 음이라면 논리는 양이다. 우리의 기억, 즉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두뇌는 모든 것을 인과관계의 틀로 분석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분명한 인과관계의 궤적을 따르지 않으면 혼란스러워한다. 이것은 신체적 고통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지어 책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게 만들 수도 있다. 


- 한 가지 규칙만 따르면 이야기가 순조롭게 이 궤적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바로 '만약, 그러면, 그러므로' 규칙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만약' 내가 손을 불 속에 넣는다(행동). '그러면' 화상을 입는다(반응). '그러므로' 불 속에 손을 넣지 말아야 한다(결정).

행동, 반응, 결정은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요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는 인과관계의 궤적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렀을 때 그를 거기까지 이끌어온 길이 뚜렷이 보일 뿐 아니라, 

돌이켜 봤을 대 왜 처음부터 이런 대립이 불피 했는지가 드러난다. 여기서 "돌이켜 보았을 때"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야기의 모든 것은, 완전히 예측이 가능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말'에서 바라본 관점에서 납득이 가능해야 한다. 


- 이것은 이야기가 꼭 일차원적이어야 한다거나 인과관계의  방식이 반드시 시간 순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야기는 시간과 장소를 갑작스레 뛰어넘거나 심지어 거꾸로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도 변함없는 것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된 감정 곡선이 명확한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러 인문의 이야기를 따라 앞뒤로 시간을 오가는, 

그래서 겉보기에는 매우 '실험적인'것 조차도 이 곡선을 따른다.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 만들기


- 시작에서부터 감정적 인과관계의 궤적을 잘 따라야 한다. 물리적 우주의 기본 법칙을 따름으로써, 열역학 제1법칙을 기억하라.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다. 혹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뭔가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뭔가가 갑자기 당신의 허를 찌른다 해도 그건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삶에서 그렇듯이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모든 일에는 언제나 인과관계의 궤적이 존재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혹은 실제 삶의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간에 말이다. 


실험적 문학이나 전위적 소설의 경우는?


- 이런 류의 소설들은 인과관계의 법칙에 매여 있지 않으며, 심지어 어떤 법칙에도 제한되지 않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소설들의 '존재 이유'는 소설에 플롯이나 주인공, 내적 논리 혹은 사건조차도 필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이것들은 이제 소설이 그런 것들을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소설들이라고 말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가 바로 그 예다. <율리시스>는 오늘날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 

이것은 당대 매우 실험적인 소설이었다. 


- 실험적인 문학은 아무 문제없이 스토리텔링의 모든 법칙을 깰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급 예술이며,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일반 소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그러나 실제 읽기 힘든 소설은 읽히지 않는다. 


인과 관계의 두 가지 차원


- 실험적이든 전통적이든, 혹은 그 둘 사이 어디쯤이든 이야기는 두가지 차원에서 도이에 전개된다.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이야기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것)과 외부적 사건들(플롯)이 그것이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이 두 가지 차원 모두를 지배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이 두 차원을 딱 들어맞게 해서 매끄러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1) 플롯 측면에서 인과관계는 표면적인 수준으로 전개된다. 하나의 사건이 논리적으로 그다음 사건을 촉발한다. 조가 클라이드의 반짝이는 빨간 풍선을 터뜨린다. 조는 광대 학교에서 쫓겨난다. 

2) 이야기 측면에서 인과관계는 더 깊은 수준, 즉 '의미'의 차원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조가 쫓겨날 것을 알면서 '왜' 클라이드의 풍선을 터뜨렸는지를 설명해준다. 



이야기는 '일어난 일이,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를 보자. 그가 풍선을 터뜨린 '이유'는 터뜨렸다는 '사실'보다 훨씬 중요하다. 즉 '무엇'보다 '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종의 서열로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오는 것은 '왜'다. '왜'가 '무엇'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왜'는 원인이고, '무엇'은 결과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 그대로다. 슬프다고 말하지 말고, 우는 것을 보여주라. 그러나 실제로는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존이 슬프다고 말하지 말고, 그가 '왜' 슬픈지를 보여주라. 


작가들이 맨 처음부터 계속해서 듣는 조언이 하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일 것이다. 훌륭한 조언이다. 문제는 이말이 제대로 설명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종종 완전히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 '보여주다'가 무조건 시각화를 의미하는 것처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듯 써야 하는 것처럼, 영화처럼 보여주라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은 이런 게 아니다. 

독자는 결과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무엇이 원인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보여주라'의 진짜 의미는 사건이 스스로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자는 의미다.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 일을 점점 더 크게 벌이기 위해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충분한 힘을 가진 '원인'을 주입해서 예상치 못한, 그러나 완벽하게 논리적인 한 방을 가진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각각의 장면이 구체적인 '행동, 반응, 결정'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긴장을 최대한으로 고조시키고, 가능성을 높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매 장면의 첫 부분마다 스스로 이렇게 묻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의 주인공은 무엇이 일어나길 바라는가?" 이게 정해지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즉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해당 장면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한 장면을 쓰고 난 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체크리스트 


1) 주인공은 변화했는가? 하나의 감정으로 시작한 주인공은, 그와 다른 감정을 갖고 끝나는가? 대개 마지막 감정은 처음의 감정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2) 문제가 있고 거기에 대한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주인공은 그 중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제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장면이 시작했던 때와 비교해 달라졌는가?

3) 독자는 그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심지어 그의 논리에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는가? 독자는 이 결정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주인공의 해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는가?

 또 그가 앞으로의 계획을 어떻게 변경했는지 아는가? 


- 일어난 일에 대한 주인공의 '내면적 반응'은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좌우할 분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사실을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많은 이야기들이 이 지점에서 길을 잃기 때문이다. 

뭔가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독자는 그 일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주인공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독자에게 아무런 감정적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다. 분명 많은 일들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보이는 외면적 반응의 이유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즉 그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독자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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