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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시험들기와 상처 입히기 |
잘못될 수 있는 것들은 반드시 잘못되야 한다
- 문제는 우리의 주인공이 반드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인공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역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어진다.
물론 이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 주인공을 사랑한다면, 작가인 당신의 목표는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은 모든 것을 눈앞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플롯을 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인공이 애를 쓰면 쓸수록, 상황은 자꾸만 더 악화되어야 한다.
착한 일을 하고도 고생해야 한다. 물론 이따금 모든 게 괜찮아 보일 때도 필요하다. 단, 주인공 앞에 더 큰 추락이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한해서, 마음을 풀어주어 카드를 살짝 내리게 만든 다음 가장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크게 한 방 먹이는 것이다.
- 당신은 주인공 안에 있는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고 싶다.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자기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고 싶다고. 내일이나 그 다음 날이나 뭐 적당한 때에 말이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적당한 때란 없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들이 주인공을 안락의자에서 끌어내어 싸움터로 밀어 넣는 걸 지켜보는 일이다. 이야기란 점점 더 커지는 도전이며,
이야기의 목표는 주인공이 그 자신의 목표에 걸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주인공을 다루는 데 있어 어렵겠지만 작가가 냉혹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더라도 그의 발바닥을 불속에 넣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말이다. 작가인 당신은 주인공이 말뿐인 허풍쟁이 영웅이 되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까.
-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그건 상업 소설에나 적용되는 얘기 아냐? 사람들은 대개의 상업 소설에서는 응당 많은 일이 일어나고 쌓이면서 여러 결과가 생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순문학 소설들은 인물 중심이기 때문에
플롯처럼 인위적인 뭔가를 필요로하지 않으며, 그냥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실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는 순문학 소설도 대중적인 상업 소설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많은 플롯을 가지고 있다.
- 순문학 소설에는 상업 소설에 비해 '큰' 사건들이 적게 일어나느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짜여진 플롯이 필요하다. 순문학 소설에서의 플롯은 보다 섬세하고 미묘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훨씬 더 다층적이고, 복잡하며, 세밀하게 짜여 있어야 한다.
인물 중심의 소설은 침몰하는 배나 쏟아지는 유성이나 해일보다는 놓쳐버린 몸짓, 재빠른 끄덕거림, 순간의 망설임 같은 것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위대한 작가라면, 이것들을 통해 진도 9.0의 지진보다도 더 강력하게 독자를 흔들 수도 있다.
그러나 착가하진 말자. 순문학 소설도 여전히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역경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떠한 시련이 주인공을 괴롭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 이 욕망이 그를 어떤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면,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는 평이하고, 시시해져버릴 것이다. 기억하자. 이야기는 주인공을 내면적 문제와 맞닥뜨려 싸우게 만드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리러니하게도 순문학 소설들은 이를 위한 훨씬 더 다양한 방법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케케묵은 격언에 속지 말자. 필요하다면 헌신짝처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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