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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감정 전달 |
주인공 감정 전달하는 방법
- 사건에 대한 인물의 반응은 온전히 내면적이다. 입 밖에 내지 않은 독백, 갑작스러운 깨달음, 회상, 혹은 에피파니(평범한 대상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정신적 현시)의 순간처럼, 이것을 이야기 속에 직조해 넣는 방법은 일인칭 시점으로 쓰느냐 삼인칭 시점으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1. 일인칭 시점으로 쓰기
- 일인칭 시점으로 쓰면서 독자에게 주인공의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은 얼핏 생각 없는 예기처럼 들린다. 일인칭 자체가 주인공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주인공의 생각이지 않겠는가?
맞다. 바로 그 지점이 까다로운 부분이다. 왜? 일인칭 시점으로 쓰는 이야기 속 모든 요소들은 반드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암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에는 그의 의견이 섞여 있다.
화자가 선택하는 각각의 디테일에는 그의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삼인칭 시점과 일인칭 시점의 차이는 무엇일까?
- 이것은 거리의 문제다. 삼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에는 독자가 전지적 화자에 의해 제시된 사건들의 의미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독자가 주인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말이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여자에게 플러시 천으로 만든 형광 오렌지색 소파를 깜짝 선물한다고 해보자. 이 사건 저체는 중립적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여자는 자신의 오래된 소파를 아끼며, 오렌지색을 싫어하고, 플러시 천은 질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선물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떨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여자가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 반면에 일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야기에서는 아무것도 중립적일 수 없다. 단 한 순간도. 화자는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이라면 결코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일인칭 시점에서 화자는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여직원이 뭘 입고 출근했는지,
마들렌이 얼마나 맛있으며, 정부가 나라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에 대해 결코 객관적으로 늘어놓지 않는다. 화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오직 이것들이 그가 하려는 이야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화자를 일종의 나르시시스트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야기 속 모든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야기하겠는가?
일인칭 시점에서 화자가 말해 줄 수 없는 단 한 가지
- 바로 다른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이다. 따라서 만약 프레드가 수와 헤어진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이런 식으로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조앤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 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ㄷ."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조앤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 수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색이 변했다" 프레드는 수의 감정에 대해 정보를 전달하거나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다.
물론 이런 식은 가능하다. 프레드는 원래 남의 속을 들여다보듯 말하는 인물이라고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라는 프레드의 확신은, 프레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진짜 수의 감정을 말해주는 건 아니다.
일인칭 시점으로 쓸 때는 다음 사항을 유의해야 한다
- 화자가 하는 모든 말은 화자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 화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은 일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 화자는 말하는 모든 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낸다.
- 화자는 중립적일 수 없다. 언제나 자신만의 목표가 있다.
- 화자는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삼인칭 시점으로 쓰기
-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쓸 때 가장 좋은 점은 독자가 이게 누구의 생각인지 혼동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일인칭 시점에서 모든 생각은 화자의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시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세 가지 경우
1. 객관적 삼인칭 시점
-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시선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따라서 작가는 결코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에서처럼 모든 정보는 오직 등장인물의 행동에 의해서만 암시된다.
객관적 삼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쓴다면, 당신은 외부 신호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몸짓 언어나 입고 있는 옷, 그리고 등장인물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를 통해서
2. 제한적 삼인칭 시점
- 단 한 사람(대부분 주인공) 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만 말해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인칭 시점과 매우 비슷하다. 주인공은 모든 상황과 장소에 등장해야 하며,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나' 대신 '그'나 '그녀'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일인칭 시점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들이 먼저 떠들어대기 전까지는.
3. 전지적 작가 시점
-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아는 믿을 수 있는 화자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시점에서 화자는 모든 인물의 마음속을 꿰뚫어볼 수 있으며, 그들의 감정과 생각, 이미 한 일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까지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다.
물론 까다로운 점도 있다. 화자가 모든 일에 계속 따라다녀야 하며, 커튼 뒤에 께속 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아주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 이 꼭두각시 인형극은 엉망이 될 수 있다. 독자들이 인형 뒤에 실이 없다는 환상을 믿어야 하니까.
삼인칭으로 전달 하는 방법
- 일단 페이지에 등장인물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는 기술을 습득하면, 독자는 자동적으로 화자의 목소리와 인물 내면의 생각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독자에게 화자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지만, 직관적으로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의견을 갖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대신 화자의 목소리는 거의 언제나 중립적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화자는 숨은 채로 모든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 바면, 등장인물의 경우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들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독자가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한 다른 설명은 필요없다.
머리 넘나들기
- 어떤 시점으로 글을 쓰든, 한 장면에서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작가가 주인공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면 그 장면에선 거기에만 머물러야 한다. 왜? 장면 중간에 시점을 바꾸는 것은 독자를 거슬리게 할 뿐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흐름을 끊는 실수를 하는 이유
- 하나의 장면에서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이 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말보다 더 효과적인 언어가 있다.
몸짓 언어
- 당신은 거리를 걷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 두 구역쯤 올라가던 당신은 저만치에서 느릿느릿 걸억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뒷모습만 봤을 뿐인데도, 당신은 그가 당신의 절친한 친구임을 알아본다.
어떻게? 그의 걸음걸이를 보고, 이것이 바로 몸짓언어의 세계다.
몸짓 언어는 거짓말이 불가능한 언어다
-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의 말에 따르면 "의도는 감정에서 비롯되고, 감정은 얼굴과 몽의 표현을 진화시켜왔다. 얼굴과 몸의 표현을 거짓으로 꾸며내기란 힘들 것이다. 실은, 어쩌면 꾸며내기 힘들기 때문에 진화한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몸짓 언어는 우리 인간이 해독법을 배운 최초의 언어다. 저 멀리 석기시대에서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과 실제 속마음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우리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야기 속에서 몸짓 언어의 목표는, 등장인물이 진짜로 느끼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특히 인물이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을 때 유용하다.
몸짓 언어를 다룰 때 흔히 하는 실수
-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앤이라는 인물이 슬프다는 것을 독자가 이미 안다면, 굳이 한 문단이나 써가며 그녀가 우는 모습을 묘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보다 독자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몸짓 언어로 말해주는 것이 낫다.
인물의 머릿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몸짓 언어를 통해 말해줄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몸짓 언어는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대립할 떄 가장 잘 작동한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해주는 것도 좋다.
여기서 우리가 그녀가 원했던 것과 실제로 얻은 것 두가지 모두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몸짓 언어는 의미가 없다. 당연한 소리 같겠지만, 작가들이 등장인물의 기대가 어떻게 귀결되는지 독자에게 일러주는 것을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지를 알면 놀랄 것이다.
편집자적 논평
- 독자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만 하면, 누가 옳고 그른지는 독자가 판단한다. 반면, 독자에게 특정한 감정을 느끼라고 강요하면, 오히려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진다. 하나의 행동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줄 때,
당신이 살짝 끼어들어 한 발짝 앞서 나아가고픈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독자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편집자적 논평은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 목적인 신문 사설 같은 글에나 완벽하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그런 일을 하면 독자는 짜증을 낼 뿐만 아니라, 당장 읽기를 그만둘 것이다. 독자가 이야기를 읽는 목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경험하기 위함이지, 누군가가 이미 내려버린 결론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는 게 아니다.
판단하지 않는 방법
- 인물들이 비열하든 훌륭하든, 작가는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그저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고 냉정하게 일어난 일들을 늘어놓고, 그 일들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재빨리 빠져나오면 끝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적게 말해줄수록, 독자는 작가가 원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독자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한 독자는 작가 손안에 있다.
'당신이 아는 것을 쓰라'는 잘못된 믿음이다. 실제로는 당신이 '감정적으로' 아는 것을 쓰라다.
"당신이 아는 것을 쓰라"에서 '아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이나 정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신이 '감정적으로' 알고 있는 것만이 지식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작가가 실제 알고 있는 것을 쓰는 일은, 위험한 게임이 될 수 있다
- 인간은 암묵적으로 내가 알고 믿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도 그러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칩히스와 댄 히스 형제는 이런 경향을 "지식의 저주"라고 명명했다.
"뭔가를 알게 된 이후에는 알기 이전의 상태가 어땠는지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지식이 우리를 '저주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쉽게 몰랐던 때의 마음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무의식적으로 독자가 작가의 관심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게 되면, 이야기는 거칠고 울퉁불퉁해지기 쉽다. 반면, 작가에겐 너무 친숙한 소재라 대충 설명하고 넘어가면, 독자는 완전히 길을 잃을 것이다.
또 너무 작은 것들을 세세히 설명하다보면, 정작 이야기 자체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실제 일어난 일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착각
- 이럴 때 마크 트웨인의 날카로운 지적이 도움이 된다. "진실이 허구보다 낯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구는 적어도 말이 돼야 하니까"
- 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인간의 본성과 사람들간 상호 작용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서 모든 일 뒤에 숨어 있는 감정적, 심리적 '이유'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누르기만 하면 지식이 튀어나오는 도꺠비 방망이가 있는가? 물론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소설가 도널드 윈드햄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아는 것을 쓰라'라는 충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알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 쓰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 단어가 커질수록 감정 전달은 어려워진다. 작가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모호할수록, 감정은 전달되기 힘들다. 이것은 풋내기 작가들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작가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의 진짜 삶을 잠시 뒤로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큰 단어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를 들어야 할 이야기로부터 방해하는 신발 속 자갈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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